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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삼년산성

기사승인 2020.08.10  09: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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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의사평론가

- 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충북 보은군. 그동안에는 뜻을 새겨 보겠다는 생각없이 무심히 지나쳐 갔지만, ‘보은(報恩)’이란 곧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이런 이름에 숨은 이야기 하나쯤 없을 리 없다. 때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훗날 정종에 이어 태종대왕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왕권 계승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정종에 이어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일곱째, 여덟째 왕자가 세자로 옹립될 기미를 보이자, 방원은 심복을 시켜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다. 훗날 방원은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지만, 두 동생을 살해한 사실은 원죄처럼 따라다녔다. 이에 태종은 속리산 법주사에서 두 왕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크게 벌여 위로했고, 이 불사 이후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죄책감이 씻은 듯 사라졌단다. 그래서 당초 ‘보령’이었던 이 지역 이름을 ‘보은’이라고 칭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에 머리 기대고 금강에 발적신 고을인 보은은 옥천·대전·청주·영동·상주로 연결되는 요지로서 삼국시대엔 백제와 신라가 서로 다투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상주를 접수한 신라는 천신만고 끝에 백두대간을 넘어와 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처음 쌓았다. 1530여 년 전인 470년(자비왕13년)의 일이다.

당시는 백제가 한강 유역의 한성에 도읍을 두고 있을 때로 신라는 백제의 남진에 대비해 성을 쌓은 셈이다. 그러나 475년 7월, 한성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7일7야’ 공격으로 전사하자, 신라는 486년 삼년산성을 더욱 튼튼하게 고쳐 쌓는다. 신라는 이미 이성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후 백제가 한강에서 밀려나 금강기슭 공주에 자리를 잡자 삼년산성의 가치는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서쪽 금강 줄기를 경계로는 백제를, 한남금북정맥을 경계로는 고구려의 침입을 대비하는 일석이조의 요새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보은을 잃더라도 본토는 튼실한 동남쪽의 백두대간이 지켜주니 더 없는 보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력확장을 꾀하던 신라로선 한강과 금강유역 확보에 아주 필요한 전초기지 역할도 했다.

삼년산성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백제였다. 551년 신라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손잡고 고구려가 장악한 한강 유역을 회복하지만, 불과 2년 뒤 백제군이 차지한 한강 유역을 빼앗아 버렸다. 성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554년 백제는 대가야군과 연합해 보은 이웃 고을인 옥천으로 쳐들어왔다. 처음엔 신라가 밀렸다.

그러다 이 삼년산성에서 출병한 군사의 도움으로 백제 군사 3만 명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신라 매복군은 전투중인 아들을 격려하러 오던 백제 성왕을 붙잡아 목을 베기도 했다.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660년 7월 백제를 멸한 태종무열왕은 9월 백제 도성인 부여의 사비성에서 삼년산성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곳에서 당나라의 웅진 도독인 왕문도와 국제회담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삼년산성은 잠재의 적에게도 자신 있게 보여 줄 수 있는 철옹성이었던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후 황금기를 구가하던 신라는 점차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는다. 822년, 태종무열왕 계열로서 웅천주 도독으로 있던 김헌창은 자신의 부친 김주원이 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대규모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삼년산성에 있던 그의 주력부대가 패한 뒤 김헌창의 군사는 기세가 꺾였고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충북 보은 삼년산성

이런 역사적 사연도 나름대로 흥미진진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산성 여행의 즐거움은 조망의 맛에 있다. 삼년산성에 오르면 무엇이 보일까. 가장 큰 문이었던 서문(西門)을 들어서면 성벽 아래로 보은 분지가 한눈에 든다. 그 너머론 한남금북정맥 산줄기가 또 하나의 성을 이뤘고, 동남쪽 멀리엔 백두대간이 든든하다.

대단한 규모와 중요한 역사적 사건같은 명성만으로 삼년산성이 무지무지하게 가파르고 높은 산 위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웬만한 산성들에 비해 접근도 수월하고 성안을 한 바퀴 도는 데도 전혀 힘들지 않다. 서문 둘레를 제외하고는 아직 복원할 엄두도 못 내고 있어 엄청난 너덜에서 세월의 무상함도 느낄 수 있다. 성 안엔 나무도 빼곡해 그늘까지 있으니 더 없이 좋다.

그런데 복원된 모습은 성곽 전문가들에게 많은 거부감을 일으켰다. 원래 성벽에 사용된 석재는 성 주변서 구하기 쉬운 점판암 계열의 돌이다. 그런데 복원과정에서 화강암 계열의 새로운 돌을 쓰다보니 전혀 조화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분홍 빛깔이 도는 돌은 비전문가의 눈에도 어두운 색이 도는 점판암 계열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삼년산성은 현재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삼년산성을 빠져나오면 길은 속리산으로 이어진다. 말티재휴게소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르면 세조가 머물던 ‘대궐터’라는 한옥 마을이 눈길을 붙잡는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죄 때문인지 괴질에 시달리던 세조는 나라의 물 좋다는 데는 다 찾아다녔다.

속리산을 찾은 것도 물 좋다는 소문을 듣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해발 430m의 말티재는 속리산의 관문이다. ‘대궐터’부터 속리산까지는 제법 운치 있는 길이 이어진다. 굽이굽이 도는 산길도 그렇고, 봄이면 벚나무 가로수에선 벚꽃이 휘날린다. 그러나 올해엔 너무 이른지 아직 벚꽃이 피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가면 정이품송(正二品松)이 반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아한 기품의 소나무로, 벼슬이 현재의 장관급인 정이품에 이른다. 이렇게 높은 직위의 안내를 받으며 입산할 수 있는 산이 속리산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사서엔 이 소나무에게 품계를 내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세조 일행이 이곳을 지나다가 우아한 소나무를 발견하고 반해서 농을 던진 게 민간에 퍼진 것인지, 부도덕한 정권을 미화하기 위한 이미지 전략으로 만들어진 전설인지는 몰라도 기품만큼은 으뜸이다. 높이 84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세쿼이어 국립공원의 ‘셔먼 장군’도 품위로 보면 정이품송을 따르지 못한다.

정이품송은 그러나, 600살이 넘으면서 가지들이 여럿 죽는 바람에 대칭의 미학이 많이 무뎌졌고, 남은 가지들도 부러지는 걸 막기 위해 쇠파이프를 받쳐놓아 체면이 많이 상했다. 그런데 지난달 내린 100년만의 폭설로 북쪽 가지가 3개나 부러지는 바람에 정이품송을 사랑하는 보은 주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법주사 들어가는 길, 아름드리 떡갈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오리숲 거닐며 수정교를 건너 금강문을 지나면,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천왕문이다. 역시 가장 큰 사천왕상이 압도할 듯 지키고 있다. 그 너머로는 우리나라 목탑으로는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 있는 5층 목탑인 팔상전이다. 이어 팔상전, 쌍사자석 등을 지나면 비로소 대웅보전.

이렇게 지나오며 본 건물이나 석물이 모두 나라에서 지정한 보물이지만, 문외한의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금강문 들어서기 전부터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던 33m 높이의 금동미륵불이다. 황금가사를 입은 미륵대불이 이 자리에 서있게 된 데는 적지 않은 사연이 있다.

의학신문 medicalnews@bo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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