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22>

[의학신문·일간보사] ‘라블레식 또는 라블레풍(Rabelaisian)’이란 형용사가 있다. ‘조야(粗野)스럽고 외설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익살맞은’ 상태나 성질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프랑스 근대문학의 창시자이며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꼽히는 프랑수와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문학이 남긴 유산이다. 흔히 진실의 문제에서 고집스레 물러서지 않고, 위선과 모든 형태의 대중적 의견에 엇설 때 쓰인다. 강렬한 유머와 풍자, 대담한 자연주의를 가리키기도 한다.

라블레는 1484년과 1494년 사이에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기에 프란체스코 수도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지식욕이 강해서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다음 의학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몽펠리에대학 의대를 졸업 후 의사로 활동하면서, 해부학 실습을 지도하고 식물 및 제약을 주제로 강의했다.

1530년대 초 수도원 생활을 완전히 떠나 세속 사제가 된 그는 1532년 리옹 시립 병원에서 의사로 잠시 근무했다. 병원에서 일하며 에라스무스와 교신했고,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서적 등을 여러 권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이즈음 당시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 『가르강튀아 대연대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팡타그뤼엘(Pantagruel)』이 인기를 끌자, 『가르강튀아(Gargantua)』(1534년)를 펴냈다. 처음에는 알코프리바 나지에(Alcofribas Nasier)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팡타그뤼엘은 ‘모든 것[panta]을 갈망[gruel]한다’는 의미다. 진지한 엄숙은 없고, 그저 먹고 마시고 떠들고 배설하며 유토피아를 꿈꾸는 거인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소설은 더러 호의를 받았으나, 종교적 억압 분위기에서 이단이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1534년 금서 처분을 받았다. 심지어 이단자로 몰려 화형의 위험에 처하자 여기저기 피해 떠돌아다녔다.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는 풍부한 어휘와 과장되고 익살맞은 문체로 박식과 풍자를 힘차게 담고 있어, 종종 셰익스피어와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과 비견되고, 『마담 보바리』의 저자 플로베르도 ‘신비에 가득 찬 아름다운 작품’이라 극찬한 바 있다. 몽테뉴와 함께 16세기 프랑스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라블레는 아리스토파네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단테와 함께 세계 최고의 5대 작가로 불린다. 또한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고, 스페인에 세르반테스가 있듯이, 프랑스엔 라블레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직자이며 의사였던 라블레가 어떻게 훌륭한 학식과 사상에 전연 어울리지 않는 라블레식 파격을 구사했을까. 연구자들은 이렇게 답한다. 거대한 시대 변화에 따른 논쟁과 갈등의 한가운데, 의사 라블레는 의학적 바탕에서 인간 자유해방의 이상적 사회 건설을 열망하며, 탁월한 은유와 우화로 르네상스적 사상과 감정을 담대하게 쏟아냈다. 실제로 라블레는 ‘의사의 창의적이고 인지적이며 열정적인 행동은 환자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어 환자 스스로 변화하고 치료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라블레를 빅토르 위고는 ‘인간 정신의 심연을 보여준 작가’, 발자크는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라 칭했다.

과장된 육체 묘사, 야비한 탐식과 배설을 문학으로 표출하며,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생명 본능의 풍요만이 진정한 삶이라고 갈망했던 라블레. 그의 출생 연도와 장소는 불확실하다. 박해를 피해 떠돌다가 1553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확인되었다.이승에서 마지막 남겼다고 전해지는 그의 말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하나를 옮긴다. “나는 거대한 아마도(grand peut-être, 영어로 grand perhaps)를 찾으려 한다. 막을 내려라, 희극은 끝났다.” 의사 라블레는 내세에서도 아마 라블레식 문학을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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