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담 유형준 교수의 의사 문인 열전<21>

[의학신문·일간보사] 필명이 모리 오가이(森 鷗外)인 모리 린타로(森 林太郎, 1862~1922)는 대대로 번주의 주치의를 맡아온 모리가문의 장남으로 일본 이와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의학 서적을 공부하려고 아버지에게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배웠다. 열 살 때 옛 영주를 따라 아버지와 함께 상경, 독일어를 배웠다. 열두 살에 나이를 속여 동경대학 의학부에 최연소로 입학, 열아홉 살에 졸업했다. 당시 센쥬에서 개원하고 있던 아버지의 진료를 잠시 돕다가, 바로 육군 군의관이 되어 도쿄 육군 병원에서 복무했다.

스물두 살에, 수년간의 바람 끝에 군의 위생 조사 및 연구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가서 약 사 년간 라이프치히 대학의 호프만 교수, 뮌헨 대학의 페텐코퍼 교수, 베를린 대학의 코흐 교수에게 위생학을 배웠고, 코흐 위생연구소에도 근무했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모리 오가이 기념관(1984년 설립, 오가이가 베를린에서 처음 살았던 건물)과 모리 오가이(오른쪽 위).

귀국 후 육군 군의관 총감, 육군성 의무 국장을 역임했다. 군에서 은퇴한 이듬해부터는 제실 박물관 총장 겸 도서관장과 제국미술원(지금의 일본 예술원) 초대 원장을 맡았고, 나라(奈良)에 있는 왕실 유물 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서 타계 직전까지 일을 계속했다.

독일 유학 중에 문학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기울였으며, 유럽 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데에도 정성을 들였다. 귀국 후 발표한 번역시집 『모습』(1889)은 일본 문단에 낭만적 정취를 불어넣었다. 안데르센의 『즉흥시인』, 괴테의 『파우스트』 등 번역서는 백 년이 넘은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1890년에 베를린에서의 독일인 소녀와 일본인 학생 사이의 불행한 애착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문체로 쓴 소설 『무희(舞姬)』를 냈다. 이즈음 도쿄미술학교 미술해부학 강사와 케이오 대학 심미학 강사를 역임하고, 동경대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고, 영화로도 상영되는 등 오가이의 소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의 하나인 『기러기』는 의대생을 향한 한 여인의 드러내지 않은 사모를 그리고 있다.

오가이의 문학은 일목요연하고 빈틈없이 정결한 문장으로 유명하다. 특히 중국 고전의 풍부한 소양이 문장의 격조를 유지하며, 가끔 귀에 익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한 다양한 어휘가 간간이 깃들여져 흥미로운 감탄을 자아낸다. 번역 역시 철저하게 글자 하나라도 속속들이 꿰뚫어 문학적 품격을 지탱하면서도 빈틈없이 바꿔 옮기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정보(情報)’와 ‘비행기(飛行機)’는 오가이가 독일어 번역 중에 만든 단어들이다.

오가이는 창작과 더불어 의학과 문학 두 영역에서 왕성한 저널리즘 활동을 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동경의사신지(東京医事新誌)』 주필로 일했고, 의학 계몽 잡지 『위생신지(衛生新誌)』와 『의사신론(医事新論)』을 창간했다. 나중에 두 잡지를 통합하여 『위생료병지(衛生療病誌)』로 발간했다. 아울러 문학 분야에선 『문학평론모음초지(草紙)』를 창간하여 오 년간 이어갔다.

나쓰메 소세키와 일본 근대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문호(文豪) 오가이는 평생 문학의 제자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오가이의 그늘이 깃들지 않은 작가와 작품은 없다.’ 할 정도로 일본 문학에 끼친 오가이의 영향력은 넓고 짙다. 나가이 가후, 키노시타 모쿠타로우, 사토 하루오, 아쿠타가와 문학상으로 잘 알려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시카와 준, 미시마 유키오 등은 오가이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작가들이다. 특히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존경하여 문장을 베껴 쓰며 습작했다.

오가이는 위축신과 폐결핵으로 향년 육십 세를 일기로 1922년, 이승의 생을 마감했다. “나는 이와미 사람 모리 린타로로 죽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묘비엔 모든 명예, 칭호, 상훈을 빼고 ‘모리 린타로 묘’ 여섯 글자만 새겨졌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 후, 이와나미 서점은 쉰세 권의 《모리 오가이 전집》을 발간했고, 그 속엔 모리 오가이의 수많은 언어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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