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화 전략만으로는 ‘생존·성장’ 한계

소유의식 강하면 외부투자 안 받아들이고 기업합병 소극적
다양한 분야 파트너와 협업이 ‘성장 전략’이란 인식 가져야

김영

- 김영 ㈜사이넥스 대표이사

[의학신문·일간보사] ‘다품종 소량생산’은 의료기기산업의 특징을 설명하는 때에 늘 처음에 나오는 말이다. 국제의료기기명명법 (Global Medical Device Nomenclature, GMDN)이 정한 의료기기 명칭과 정의가 약 2만2천여개라는 사실만 보아도 의료기기산업이 매우 다양한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식약처가 규제 목적으로 비교적 크게 분류한 의료기기 품목명이 2,200여개 이고, 미국 FDA가 분류한 의료기기 품목명이 4천개가 넘는다.

품목이 다양하니, 그만큼 품목당 평균 시장규모도 작기 마련이다. 한 기업이 한 품목의 의료기기만을 다루는 사업을 한다면, 그 기업의 성장은 그 작은 시장의 규모를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더 많은 종류의 제품을 확보하는 것이 의료기기 기업의 매우 중요한 성장전략이다. 세계 최대 의료기기 기업인 메드트로닉 본사의 2019년 매출은 306억불(약 35조원)인데, 이 기업이 보유한 의료기기 품목수는 24,781개이다. 단순 계산으로 한 제품당 연 평균 매출액이 약14억원이다. (숫자에 의미를 두지 말자. 의료기기 영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회사도 깨알같이 작은 매출을 모아서 큰 매출액을 만든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비유로 말한 것이다.) 글로벌 최대 기업의 한 제품당 연간 판매액이 이 정도라니, 의료기기 시장이 품목별로 보면 얼마나 ‘소규모’ 인지 잘 알 수 있다. 결국 잘 팔리는 제품을 더 많이 확보 할수록 그 기업의 성장 잠재력이 큰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한편, 의료기기 세부 분야별로 들어가보면 기술적, 사업적 특성이 매우 이질적이다. 그래서, 기업이 성장을 위하여 품목군을 확장하고자 할 때에, 새로운 기술의 획득과 생산, 판매에 필요한 역량과 시설, 지식과 경험까지 내부화 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 만 아니라, 실패의 위험도 크다.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야 한다. 의료장비를 다루던 사람이 소모품 비즈니스를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정형외과 분야를 잘 아는 사람이 영상의학과 분야를 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시장 상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을 때에는, 이런 내부화 전략만으로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여 생존과 성장을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판매 중심의 기업의 경우, 다른 기업이 이미 개발한 기술 중 현재 자사의 포트폴리오에서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는 제품을 추가하여 판매할 수 있다면, 기존 마케팅 영업 인력을 가지고 같은 고객군을 대상으로 더 많이 판매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제조 기업이라면, 생산 품질 관리에 경험이 많은 제품에 대한 생산 의뢰를 더 많이 수주하여 생산시설과 인력의 가동률을 더 높일 수 있다. 연구개발 전문 기업이라면, 개발 완료된 의료기기를 양산 판매할 기업에게 생산 및 판매 권한을 넘기고,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착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픈이노베이션의 아주 간단한 예시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협업, 외주, 콜레보레이션, 전략적 제휴, 기업 합병 등 어떤 형태이던 외부 인력 또는 기관과의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내 의료기기 기업의 오픈 이노베이션은 어느 정도 활발할까? 아쉽게도 국내 의료기기 분야에서 오픈이노베이션 형태의 체계적 분석이나 활성화 정도를 평가, 분석한 자료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산업과 비교하여 기업 인수 합병이 적고, 기업 간 협업도 저조하다는 견해는 이 업계 내외에서 공감되고 있다. 한 산업 분석가는 우리나라 의료기기 기업이 올망졸망 소규모인 것이 의료기기 중소기업 오너가 기업가정신 보다는 내 것을 지키겠다는 소유 의식이 강해서 외부에서 투자를 잘 받아들이지 않고, 기업 합병에 소극적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일부 맞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나, 전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일랜드 골웨이 (Galway)와 덴마크-스웨덴의 메디콘 밸리(Medicon Valley)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기기 클러스터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원주 의료기기 테크노밸리와 유사하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아일랜드 골웨이는 다국적 기업이 생산기지로 많이 활용하고 있는 의료기기 생산 단지이다. McCormack et al(2015)는 아일랜드 골웨이에 소재한 의료기기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오픈이노베이션 형태와 동기를 조사, 분석한 흥미로운 결과를 보고하였다.

아일랜드 골웨이 의료기기 클러스터에는 약 250개 아일랜드 의료기기 기업과 다국적 의료기기 기업의 생산시설이 소재하고 있으며, 약 25,000명의 종사자가 생산하는 79억 유로(약 10.5조원) 규모의 의료기기를 매년 수출한다. 이는 아일랜드 전체 수출액의 약 8.5%에 해당하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구가 5백만도 채 안되는 작은 국가에서 이렇게 큰 의료기기 생산과 수출 규모를 이루게 된 비법이 궁금해진다.

이 조사는 골웨이 클러스터 소재 의료기기기업을 대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에 대한 동기, 경험, 인식 등에 조사를 실시했다. 오픈이노베이션의 형태는 다양하여 연구개발 외주, 분사, 합작투자 또는 지분확보를 통하여 신규 또는 기존 사업에 참여, 특허를 라이선스 아웃하거나 특허를 사오는 등 다양했다. 오픈이노베이션의 파트너도 경쟁사, 연구소, 컨설턴트, 엔지니어, 공급사, 고객, 병원, 환우회, 자금지원기관 등 다양한 성격의 기관과 제휴하고 있었다. 오픈이노베이션의 동인은 차별성 있는 시장 기회 포착, 빠른 기술의 변화와 짧은 라이프 사이클, 사업환경의 급변, 인력의 이동, 매출 창출 필요성을 들었다. 오픈이노베이션을 꺼리게 하는 요소는 자본의 부족, 내부 저항(변화에 대한 저항), 외부 저항(정부 지원, 기술문서 개발, 정부 지원, 법적/규제적 우려, 비즈니스 모델, 관리의 어려움, 비용, 적절한 네트워크의 존재) 등이 있었다.

연구자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오픈이노베이션의 4가지 핵심 요소를 추렸는데, △네트워크의 개발 △지식의 교류와 통합 △지식재산권의 보호 장치 △비즈니스 모델이다. 또한, 이를 효과적 실현하기 위하여 제조자, 의사, 연구소, 정부 등 이해관계자간의 네트워킹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오픈이노베이션을 저해하는 요소를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나아가 최근 연구에서는 기업들이 처음에는 제조(수탁 제조) 중심에서 연구개발과 기술혁신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는 점을 관찰하였는데, 아일랜드 골웨이 의료기기 클러스터는 연구개발과 생산 분야에서 가장 많이 협업하고 있고, 특히 연구개발을 외주하는 –또는 외부에서 개발된 기술을 사들이는– 데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저변에는 오픈이노베이션을 가장 중요한 성장 전략으로 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보았다.

조사 결과는 우리에게 오픈이노베이션의 방법 및 기술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희망을 가지고 협업을 시도했다가 낭패를 본 사람을 본다. 결국 다양한 형태의 의료기기 협업 관계에서의 핵심은 “신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필요성에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지구 반대편의 공장에서 만든 의료기기의 품질을 믿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데에 노하우를 기꺼이 공유할 사람,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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