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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정과 느티나무

기사승인 2020.03.30  09: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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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의사평론가

[의학신문·일간보사] 서울 광진구 화양동소재 보호수 화양정 느티나무는 높이 28m, 가슴높이의 둘레가 7.5m나 된다. 나무 옆에는 조선시대 때 만든 화양정(華陽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그 아래는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자주 이 정자에 나와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고 뛰노는 말들을 살펴 보곤했다고 전한다.

느티나무는 느름나무과에 속하며 가지가 사방으로 고르게 자라 둥근 모양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잎은 긴 타원형이거나 계란형인데 잎끝이 좁고 잎 가장자리는 톱니 모양으로 생겼다. 이 나무는 5월에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를 맺는다. 이 나무는 그늘이 좋아 정자목으로 쓰기 위해 많이 심었다. 목질이 좋아 고급가구를 만드는 데도 많이 쓰인다.

화산(지금 삼각산)동쪽 한수(漢水) 북쪽에 들이 있으니 땅이 펑퍼짐하고 넓으며, 그 길이와 너비가 10여리나 된다. 뭇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드리웠다. 태조가 도읍을 정한 당초에 이곳을 목장으로 삼았다. 임자년(1432)에 세종임금께서 사복시제조 관충추부사 최윤덕(崔潤德)과 이조참판 정연(鄭淵)에게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다. 주부 조순생(趙順生)이 그 일을 모두 주관하고 나에게 와서 그 자세한 것을 말하였다. “내가 듣고 나서 천하의 누대(樓臺․정사) 모두 이름이 있거늘 이 정자만이 이름이 없어서야 될 것이냐 싶어, 마침내 주서(周書) 가운데 ’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고 이름 하였다.”

화양정은 조선 세종14년(1432)에 지어진 세종 소유의 정자가 있던 곳이며, 화양정이 세워지기 전부터 국가에서 사용하는 말을 기르는 국립목장이자 군사훈련을 하였던 곳이었다. 화양정은 4각정자로서 기둥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내부는 100여간 이상이어서 규모가 매우 컸다. 화양정은 조선의 슬픈 왕 단종이 영월로 귀양 떠날 때 잠시 머물던 곳이다.

창덕궁에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을 세조는 노산군으로 내려 앉히고 영월로 귀양을 보낸다. 단종은 한양도성을 인적이 뜸한 심야에 떠난다. 4대문 중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숙정문을 통해서다. 성상문을 따르던 성균관 유생들이 숙정문 밖에서 단종을 배웅한다. 단종은 오늘의 삼청동 성북동을 거쳐 낙산 자락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 송씨와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이튿날 청계천 영도교를 건너서 살곶이벌 화양정에 도착한다. 세조는 화양정으로 신하를 보내 배웅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산군(魯山君)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이 역모(逆謀)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하였다.(세조실록 8권, 세조3년(1457) 6월 22일 갑인 2번째 기사에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도 사냥을 좋아해 화양정을 자주 찾았다. 연산군 일기를 살핀다. 왕은 동교(東郊)에 납시어 농사를 구경하고 전곶(箭串)에 당도하여 학익진(鶴翼陣)을 쳐 짐승을 사냥하고, 화양정에 머물러 승지·사관 등으로 하여금 각기 절구시(絶句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학익진을 미륵동(彌勒洞)에 치고 짐승을 사냥하였으며, 환궁할 적에는 길가의 농민들을 먹였다.

화양정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에 있던 정자이다. 이 일대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당시 말을 먹이는 목장이었다. 세종 14년(1432)에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화양정으로 정자의 이름을 정한 사연을 살펴보았다.

세종 때 동지중추원사 유사눌(柳思訥)이 주서(周書) 가운데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 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화양(華陽)’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남쪽으로 한강의 흐름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용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립목장 살곶이벌(箭串坪) 언덕 위에 있는 이 정자에서 세종은 방목한 말들이 떼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화양은 화산 남쪽에 자리한 명당이라는 뜻이다. 화산은 조선의 중심 산 북한산이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임금과 함께 화양정을 찾아 절경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한양도성 동쪽 들녁(東郊) 살곶이목장 중심부 화양동이다. 화양은 북한산 남쪽에 자리한 천하제일의 명당길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명당길지를 오랜 세월 지켜온 노거수(老巨樹) 느티나무가 혈(穴)에 듬직하게 버티고 있다.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는 곳은 느티나무 공원으로 조성했다. 안에는 화양정 터 표석도 설치했다.

느티나무는 직경 6m, 높이 2m의 원형 대지 위에 서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강석이 3켜 정도 쌓여 있다.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반경 4m 정도 떨어져 스테인리스 철책이 1m 높이로 둘러 처져 있다. 나무높이는 28m이며, 가슴높이 직경이 7.5m, 수관폭 18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로서 수령이 700여 년이나 된다. 원줄기는 2.3m 높이에서 네 갈래로 갈라졌는데 북서쪽 줄기는 5m 높이에서 일부가 썩어 잘렸고 나머지 부분이 곧게 뻗었고, 북동쪽 줄기는 건강하게 뻗었다. 남동쪽 줄기는 3.5m 높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남서쪽 줄기는 2∼2.7m 높이에서 절단되었으며 절단 부위 아래에서 가지가 뻗어 자라고 있다. 남서쪽 줄기에 해당하는 뿌리의 지표 노출부가 썩어 외과 치료를 받았고 원줄기 서쪽 부분이 직경 15cm 정도로 구멍이 나 치료를 받았으며 8m 높이에서 북서쪽 줄기와 남서쪽 줄기를 철제 막대로 연결하여 고정시켜 놓았다. 나무 바로 옆 북서쪽에 길이 110cm, 폭 48cm, 높이 40cm의 상석이 놓여 있으며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이 정자는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왕후와 관련이 있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다음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갈 때 이 화양정에서 전송하였는데 “화양정, 화양정”하고 중얼거리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회행길이 되었으면 하고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 원혼이나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 19년(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변복(變服)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장호원으로 피해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도중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화양정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고 한다. 사각정(四角亭)으로서 기둥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그 내부가 100여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양정은 1911년 7월 21일 낙뢰(落雷)로 무너지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서 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의학신문 medicalnews@bosa.co.kr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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