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전임의 외래는 ‘필수’·당직은 ‘기본’…전공의 떠난 빈 자리 맡아 허덕

[의학신문·일간보사=안치영 기자] 전공의 특별법 시행 이후 대형병원·기피과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자들의 사투’가 이어지고 있다. 전공의 주당 80시간 근무 제한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력 부족 사태를 전공의가 아닌, 전공의 당시 일을 도맡아 했던 교수와 전임의가 일을 떠맡아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직과 외래를 오가는 교수들

지난 11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심뇌혈관질환의 체계적 국가 관리를 위한 대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한 목소리로 ‘당직라인이 무너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차재관 동아대병원 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장은 “어제 당직근무를 하고 오늘 토론회에 참석으며, 이제 토론회를 마치고 다시 당직근무를 서고 내일 오전 90명 환자의 외래 진료를 봐야 한다”며 인력 부족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대한뇌졸중학회 나정호 이사장도 “가장 큰 위기는 의료진의 번아웃”이라며 “환갑에 당직서는 의사가 나올 판”이라고 밝혔다. 나정호 이사장의 눈은 붉게 충혈돼있었다.

인력 부족의 문제는 비단 심뇌혈관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인력 부족을 겪어야했던 대형병원 산부인과는 이제 빅5병원을 제외하고는 ‘교수가 당직을 서는 모습’이 일상화됐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오늘 진료와 당직을 서고 다음날 수술 스케쥴을 다 소화하고 퇴근하는게 일상다반사”라며 “이제는 기대도, 희망도 없다”고 토로했다.

외과는 아예 수술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있다. 지난달 입원전담전문의를대대적으로 모집하겠다고 나선 서울대병원은 외과 입원전담전문의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수술을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박규주 서울대병원 외과장은 “외과의 영역이 다양화되고 있고 근무요건으로 보자면 현재 외과는 수술이 다가 아니라 외적으로 팽창해가는 단계”라며 “입원전담의가 없다면 외과 차원에서도 수술을 3분의 2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겪고 있던 흉부외과는 아예 구체적인 자료까지 제시했다.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가 지난해 4월 흉부외과 전문의 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문의 근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흉부외과 전문의들은 하루 평균 12.6시간을 근무, 주당 평균 76.1시간을 근무하고 한달 평균 당직일수가 6.5일에 달했다.

이같은 자료는 전공의법 시행 이전에 조사된 자료라서, 현재 흉부외과 전문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은 90시간에 육박할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당신의 현재가 제 미래라서’…떠나는 전공의들

근로 환경 악화는 전공의의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기피 진료과로 분류되는 진료과 대부분은 올해도 전공의 모집이 미달되는 아픔을 겪었다.

내년도 전반기 전공의 모집 결과 32개 수련병원 중 산부인과는 19개 병원에서 정원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과에서도 수도권 17개 수련병원 중 경희의료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중앙대병원 5곳을 제외한 나머지 12개 병원이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서울아산병원과 가톨릭중앙의료원도 정원 미달을 피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전공의들 또한 떠나가고 있다. 인하대병원 권역심뇌혈관센터장을 맡고 있는 나정호 이사장은 “연차당 8명씩 있던 전공의가 권역센터 지정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현재 1명만 남았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한 수도권병원 산부인과 교수 또한 “지원했던 전공의가 출근 안하고 있던 전공의도 나가서 우린 이제 한 명만 남았다”면서 “어차피 기대도 안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현상은 기존에 전공의가 담당했던 노동력을 이제 기존 의료진이 메꿔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전공의들의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한 전공의는 “지금 이른바 ‘낀세대’들의 모습이 당장 몇 년 뒤 내 모습이 될텐데 누가 떠미는것도 아니고 뭣하러 그런 어려운 곳으로 갈 생각을 하겠냐”고 지적했다.

아예 집단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한 수련병원에서는 전공의들이 합심해 집단으로 출근을 거부, 병원과의 협상을 통해 처우 개선을 얻어내기도 했다.

처우 개선 중에는 당직 근무 줄이기와 급여 개선 등도 있었지만, 본인에게 할당된 각종 의료 술기를 줄이기 위해 전문인력을 더 채용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샌드위치 세대’의 미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열악한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의료진들에게 남아 있는 미래는 그리 밝진 않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외과와 산부인과, 흉부외과 등 기피과 의료진들은 한목소리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는데 동의한다.

나쁜 상황들이 계속 쌓이고 쌓여 결국 기피진료과에는 좋은 사람들이 남지 않는, 황폐화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장 의료진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들을 대물림하긴 싫다는데 공감한다. 대부분의 기피 진료과 교수들은 ‘어차피 전공의들과 말이 통하기도 쉽지 않고, 그냥 내가 조금 버티다 가겠다’는 생각이다.

반면 해당 진료과 전임의 등 주니어 스텝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하루빨리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져 ‘사람답게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한 수련병원 외과 전임의는 “내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당장 눈 앞에 환자가 있고 난 이 환자에게 충실하기에도 벅차다”면서 자신의 입장 표현 자체가 어려움을 호소했다.

결국 전 의료계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한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없지만, 국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설득하고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과제는 남아있다.

이와 관련, 임태환 대한민국의학한림원장은 “이제 의료계에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절대 없어져야 한다”며 “건강한 의료생활과 발전을 위해 (의료인이) 이제 국민들에게도 목소리를 낼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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