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균
서울 성북·이정균내과의원장

영등포구는 한강 속에 가장 많은 섬들을 가지고 있는 서울시의 자치구다.

선유도(仙遊島)와 한강 밤섬, 여의도 등 세 개의 섬이 있다. 옛 풍류의 섬 선유도는 ‘선유도’란 섬 이름보다 선유봉(仙遊峰)으로 더 알려져 왔다. 이 섬은 양화대교(楊花大橋) 중앙에 있는 작은 섬 양화대교 중앙 하중도라 불렀다.

이 작은 섬은 그 이름처럼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 불렸고, 매우 아름다운 섬이었으나, 개발을 위한 석재 채취, 토사 채취 등으로 예전의 봉우리는 없어지고, 정수장이 세워져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2002년 4월에는 선유도 공원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선유봉은 산봉오리가 해발 40여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섬 모양이 고양이처럼 생겼다하여 괭이산(고양이산)이라고도 불러 인근 쥐산과 대조를 이루었다. 선유봉 암석의 꿋꿋함을 칭송하여 중국 황하의 지주봉(砥柱峰)을 견주어 말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선유봉에 인접했던 양화도나루 사이에 백사장이 많고, 수심이 낮아 건기 때엔 거의 걸어서 건널 수 있었으며, 마포와의 사이엔 강폭이 넓고 물결도 잔잔하여 강상(江上)에 취흥을 돋우는 배를 띄우기도 좋았다.

옛 선유정수장을 재활용하여 탄생한 선유도공원 내 수생식물원.

고려시대에는 양화도 나루를 경유하여 마포의 잠두봉을 잇는 한강의 경승지로 널리 알려지고 춤도 성행해서, 경승지 찾아 풍류를 즐기던 중국 사신들도 그 풍경에 감탄하면서, 수많은 시를 짓고 읊었다 하며, 풍류객들은 강상풍월(江上風月)을 감상하며 아예 이곳에 누각이나 정자를 지어 기거하면서 선유봉 주변 한강 뱃놀이와 풍치를 즐겼다고 한다.

왕위를 세종에게 양보하고 명산대천의 자연풍경을 즐겨 찾았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은 말년에 이곳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고서 한가롭게 지냈다 한다.

조선시대 대표적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은 1741년 경 선유봉을 배경으로 양화환도(楊花喚渡) 금성평사(錦城平沙), 소악후월(小岳後月) 등 3편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남겼다.

1899년 경기양천군읍지지도(京畿陽川郡邑誌地圖)에는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가 양화도(선유도)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 공후인을 지어서 공후를 탔다(藿里子高 妻 麗玉 楊花渡 見人沒 作 引 彈 公無渡河曲云)는 구절이 있다.

이 글 내용은 우리나라 국문학상 최초의 노래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그 시대적 무대가 고금주(古今注)<해동역사ㆍ海東繹史>라는 문헌에 의해 대동강변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 위원 손주영씨는 위 문구를 들어 공무도하가의 무대가 어디인지 새로이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강서문화와 역사에서 새로이 밝히고 있다.

한국 영화의 대명사였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질문에 ‘영원한 사랑도 있다’고 화답한 원전(原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다시 읽어본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공무도하(公無渡河)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공경도하(公竟渡河) 님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타하이사(墮河而死) 물에 빠져 돌아가셨으니
장내공하(將奈公何) 장차 님을 어이할꼬.

공무도하가의 배경설화는 이렇다. “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새벽에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희고 미친 사람이 호리병을 흔들고 어지러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가며 막으려 했으나 남편은 빠져 죽고 말았다. 아내가 노래를 지어 부르니 매우 구슬펐다. 노래를 마친 아내는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공무도하가는 한국 최고(最古)의 시가다. 동서고금의 이상인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사랑을 극적이고 시적으로 묘사한 고전이다. 모티브를 공무도하가에서 받은 이윤택 대본 연출, 안숙선 작창(作唱)의 음악극 ‘공무도하’는 국립국악원의 브랜드 공연으로 11월 무대에 올려 크게 주목받았다.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다큐멘터리 독립영화로 역사를 새로 썼다. 76년 동안 해로(偕老)하였고 할아버지는 98세에 타계, 할머니 89세의 노부부의 사랑과 사별, 그 사실 그대로 담은 영화다.

선유봉은 1925년 대홍수 후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의심되기도 하는 석연치 않은 한강치수사업을 계기로, 서울의 화표(華表)인 선유봉의 암석들이 마구 채취당해 제방을 쌓거나 제2차대전 물자조달에 사용되면서 봉오리가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고 광복 이후 개발우선 도시개발의 여파로 남아 있던 선유봉 암석들마저 계속 채취되었다. 1965년 양화대교가 개통되면서 봉오리는 대부분 허물어졌다. 1978년에는 선유정수장이 설치됨으로써 선유봉의 아름답던 옛 모습은 사라졌다.

선유도는 2002년 4월 선유도 공원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시원한 한강의 자연경관, 일망무제 월드컵 경기장, 북한산, 남산, 여의도가 한 눈에 들어오고 푸른 한강의 물을 따라 새로운 터전이 자부심으로 변했다.

선유도 공원에 새로 들어선 시설물을 먼저 살펴보자. 선유정, 선유나루, 원형소극장, 한강역사관, 시간의 정원, 만남의 숲, 열린 마당 등 테마 정원의 다양한 시설들이 돋보인다. 옛 정수처리장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멋진 정원, 옛 벽의 흔적, 원형구조물 등 자연과 인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매력적인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선유교는 환상의 다리가 되었다. 한강시민공원이 양화지구와 선유도 공원을 이어 놓았다. 선유교를 걸어보면 환상의 세계 여행길이 된다. 이제 선유도 공원은 선유정수사업장을 그대로 놔둔 ‘재활용 생태공원’이 되어 서울시내 한강시민공원 12개 지구 가운데 으뜸가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곳이 되었다. 부서진 콘크리트 기둥과 녹슨 철로 더미에서 시간의 향기가 배어나오고, ‘도심 재생’시대를 알리고 있다.

선유교는 양화지구와 선유도를 잇는 아치형 보행전용다리다. 다리 초입 너비 12m, 다리 중앙으로 갈수록 너비가 4m까지 좁아진다. 다리 바로 아래는 한강이다. 바람 불면 흔들리기도 하나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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